역사

17연대 화령장 전투’ 윤창렬·변원균 예비역 일등중사

sej57 2018. 4. 17. 11:29

숨죽인 사흘 매복… ‘사격개시 !’ 에 적군 새까맣게 쓰러져”

1부. 무공훈장의 영웅들 ④‘화령장 전투’ 윤창렬·변원균 예비역 일등중사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  육군 17연대 소속으로 화령장 전투에 참전했던 윤창렬·김석근·변원균(왼쪽부터)씨가 지난 7일 경북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화령장 지구 전적비 부근에 전시된 전차 앞에서 당시의 치열했던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상주 = 심만수기자
▲  1950년 김석근(왼쪽)씨가 화령장 전투를 마친 한달 후쯤 안강지구에서 17연대 부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석근씨 제공
“북한군이 6월25일 38선을 침공하자 옹진반도를 지키던 우리 17연대는 연전연패하면서 경북 상주 부근까지 내려왔었습니다. 승리에 목이 말라 있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바로 화령장에서 적 전령을 붙잡아 설욕의 기회를 잡았던 것입니다. 당시 전황이 불리했던 때라 17연대가 화령장에서 북한군 15사단을 막지 못했다면 상주 이남까지 순식간에 북한군에게 점령됐을 것이고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육군본부 직할 독립연대였던 17연대의 2대대와 3대대 소속으로 화령장 전투에 참가했던 윤창렬(80·당시 일등 중사)씨와 변원균(80·당시 일등 중사)씨, 김석근(80·당시 일등 중사)씨 등은 지난 7일 ‘화령장 전투’가 있었던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일대 격전지를 바라보며 60년 전 연전연패를 거듭하다 쾌거를 이룬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김씨는 “7월17일 먼저 도착한 1대대가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 송계초교 건너편 상곡리 야산에 매복한 채 당시 저녁밥을 지어먹고 휴식을 취하려던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전멸시켰다”며 “선발대가 무사히 통과했다는 사실에 방심한 북한군에게 일격을 가한 전투였다”고 말했다. 

윤씨 등을 포함한 2대대와 3대대는 18일 오전 화령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전날 1대대의 승리에 기뻐할 틈도 없이 북한군 15사단 49연대가 화령장 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윤씨는“도착하자마자 적군이 다시 진격해온다는 소식에 갈령고개를 넘어오는 길목인 동관리 봉황산에 개인호를 파고 약 3㎞에 걸친 구간에 매복을 했다”며 “언제 북한군이 내려올지 모르니 이틀밤을 꼬박 샜다”고 말했다. 그는 “때론 지루하지만 결코 긴장의 끈을 놓을 순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17연대 2대대 소속 400여명이 매복한 지 3일째인 20일 새벽 5시쯤. 진지 오른쪽 끝에 위치한 7중대로부터 ‘북한군의 선두가 갈령고개를 넘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쳐가던 부대원들은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적의 모습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북한군 선두가 모습을 드러내며 아군 방어진지 전방으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7연대 부대원들은 이들 중 한 명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북한군이 3㎞에 걸쳐 구성한 아군의 ‘화망(火網)’ 안에 모두 들어올 때까지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김씨는 봉황산 앞으로 난 길을 가리키며 “지금은 이렇게 차가 다니지만 당시에는 달구지 하나 겨우 다닐 정도의 신작로였다”며 “이 길을 따라 북한군 행렬이 끝없이 내려오는데 불과 눈앞 50야드(약 45m)에 두고도 사격을 못하고 참고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군이 화망 안으로 들어오기까지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여름 새벽 모기가 기승을 부려 온몸이 따끔거렸지만 17연대 부대원들은 숨 죽인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윤씨는 봉황산 3분 능선을 가리키며 “바로 저기서 북한군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쏘고 싶었지만 상주까지 쫓겨오며 희생된 전우들의 복수를 위해 더 큰 전과를 올리려면 꾹 참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오전 6시30분쯤 북한군의 후미가 7중대가 위치한 화망 안으로 들어오자 드디어 사격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변씨는 갑자기 “청색 오성신호탄이 하늘 위로 솟구치면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갑자기 쏘아 올려진 신호탄에 놀란 북한군은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3㎞에 이르는 아군 진지에서 400여명이 쏘아대는 총탄에 북한군은 멀리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주저앉거나 논 배수로 등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격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여기저기서 하얀 손수건을 흔들어댔다. 총탄에 맞은 북한군이 길과 논바닥에 새까맣게 쓰러졌다. 

당시 중화기 소대에서 반장을 맡고 있었던 윤씨는 “전쟁하면서 동관리에서 제일 원 없이 기관총을 쏴본 것 같다”며 “중기관총 반장이었지만 사수한테 총을 넘겨받아 직접 쐈다”고 말했다. 김씨도 “사냥꾼에게 쫓기는 꿩처럼 북한군들이 개울물이나 볏단 속에 얼굴만 처박고 있는 꼴이 가관이었다”고 당시의 통쾌했던 순간을 전했다.

이날 17연대 2대대는 불과 2시간 남짓한 전투로 적군 356명을 사살하고 포로 26명을 붙잡았다. 박격포와 대전차포, 기관총과 소총 등 전리품이 수백점에 이르는 등 국군의 후퇴일로 상황에서 큰 쾌거로 남은 전투였다. 

화령장 전투가 끝난 뒤 현장에 도착했던 미군 고문관인 스카레키 중령이 남긴 “군생활 동안 1, 2차 세계대전을 다 겪었지만 이처럼 통쾌한 전투는 처음 봤다”는 증언은 ‘동관리 전투’를 소개한 표지판에도 선명히 새겨 있다. 

전투가 끝난 후에야 알려진 사실이지만 화령장은 당시로서는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에 있어 여러 산간도로가 모아졌다가 다시 흩어지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군은 이를 알아채지 못한 채 별다른 방어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은 상태였다. 북한군은 이곳의 방어병력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고 총공세를 펼치기 위해 이동 중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17연대가 중간 기착점인 화령장에 도착했다가 북한군 전령을 붙잡은 덕분에 북한군이 소백산맥을 손쉽게 통과하는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 

윤씨 등은 화령장 전투가 끝난 후에도 17연대 소속으로 6·25 격전지를 누비며 사투를 벌였다. 1950년 8월 치열하기로 유명한 비학산 전투에서 40일간 북한군과 공방을 벌인 데 이어 9월에는 인천상륙작전에도 가담했다. 윤씨는 여러 전투를 거치며 전과를 올린 수훈을 인정 받아 그해 12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변씨는 같은해 11월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윤씨는 “요즘 세대들을 보면 적과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적의 공격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60년 전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6·25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 17연대가 기습적인 매복으로 북한군을 섬멸한 화령장 전투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전력이 우세한 병력도 선제 공격을 받는다면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며 “우리도 첨단무기의 우세만을 믿고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상주 = 채현식기자 hscha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