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HeartbreakHotel>, <Don’t BeCruel>로 선풍적인 화제를 일으키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황제로 군림해오고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처음 출연한 동명 타이틀의 영화 주제곡이다. 이 곡은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되면서 빌보드 차트에 연속 4주간 톱을 장식하는 대 인기를 거두었다. 1861년 "Aura Lee"라는 제목으로 W.W Fosdick 과 George R.Poulton 이 쓴 이 곡은,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 북군측이 즐겨 부른 노래라고 한다. 1865년에는 'Army Blue'라는 새로운 제목과 다른 가사로 바뀌어 West Point의 졸업식에서도 불려졌었다 하며, 1936년에는 영화 "Come and Get It"에서 Frances Farmer가 "Aura Lee"를 불렀었다고 한다. 생애 31편의 극 영화와 2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던 Elvis는 1956년 그의 첫 영화인 "The Reno Brothers"의 사운드 트랙 녹음 작업을 위하여 8월 24일과 9월 2일, 그리고 10월 2일 Hollywood의 Foxstage 1 에서 녹음작업을 하였다. "Love Me Tender"는 8월 24일 녹음을 하였는데, 당시 Elvis의 인기에 편승하여 8월말 영화의 제목도 "Love Me Tender" 로 바뀌게 되었다.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1956년 10월 "Love Me Tender / Any Way You Want Me" 가 싱글로 발매가 되어 5주간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Love Me Tender"는 엘비스의 부인이었던 프리실라가 결혼 전 처음 듣게 되었던 노래로 그녀가 좋아하는 곡이었으며, 1962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Love Me Tender"가 연주되는 담배 케이스를 프리실라가 엘비스에게 선물 했었다 한다.
“나는 한 번도 무대공포를 극복한 적이 없다. 매번 공연 때마다 걱정이다. 늘 공연에 대해 생각하고 절대 편안한 적이 없다. 나는 관중이 내 공연을 편안하게 보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때부터 발전이 멈추기 때문이다. 나는 공연장 밖에 늘 새로운 관중이 있고 그들은 나를 본 적도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고 믿는다.” ‘제왕(The King)’다운 말이지요? 그러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어릴 적 삶은 남루했습니다. 아버지는 교도소를 들락거렸습니다. 어머니가 재봉틀일로 가계를 꾸려나갔지만 지독한 가난 때문에 흑인 슬럼가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지요. 자신감이 없어 말을 더듬었고 ‘마마보이’란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했지요. 엘비스는 11세 생일 때 주변의 흑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권총을 선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권총의 의미를 알았기에, 대신 기타를 선물합니다. 사랑과 꿈을 선물한 것이지요. 엘비스는 고교 졸업 뒤 낮에는 트럭을 몰며 돈을 벌고 밤에는 노래를 부르며 ‘가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생일 기념으로 음반회사에서 자신의 음악을 녹음해 선물했는데, 이것이 제왕이 탄생하는 실마리가 될 줄은 몰랐을 겁니다.
음반사의 여직원이 엘비스의 노래를 듣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둔 다음, “좋은 발라드 가수. 꼭 붙잡을 것”이라고 메모했습니다. 나중에 이 레코드사의 사장이 흑인 노래를 잘 부를 백인가수를 찾을 때 이 메모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엘비스의 노래 “That's All Right(Mama)”가 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 청취자들의 엽서와 전화가 폭주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가수가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엘비스는 우리나라에서는 발라드 곡이 주로 알려져 있지만 흑인음악을 백인의 영역에 끌어온 ‘혁명적 가수’였으며 로큰롤, 로커빌리(록과 컨트리 음악이 섞인 음악), 컨트리, 가스펠 네 분야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유일무이한 가수입니다. 많은 사람이 불운과 행운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엘비스가 가난 때문에 흑인 슬럼가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의 음악은 없었을 겁니다. ‘마마보이’로 왕따를 당했지만, 어머니의 꿈을 알고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행운이 왔습니다. 1977년 오늘 세상을 떠난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일에 생각합니다. 혹시 내일 눈부신 영광이 될 씨앗을 불운과 불행, 역경이라고만 여기고 한탄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인가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도 세상을 탓하며 요행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삶이 점과 점으로 연결돼 있다는데, 그 점이 눈앞에 있는데 눈 감고 있지는 않은가? (유샤인님의 글 옮김)
죽은 후에도 연간 3700만달러 (한화로 약 475억6000만원) 벌어
엘비스 이전엔 아무 것도 없었다 (Before Elvis, there was nothing) - 존 레논 (비틀즈) 엘비스는 20세기 가장 강력한 문화이다. 그는 음악, 언어, 복장, 모든 것에서 앞섰다. 그건 사회적 혁명이었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1956년 'Heartbreak Hotel'과 함께 등장 하면서, 전 세계 음악과 문화의 표현 형태를 바꾸어 놓았던 엘비스 프레슬리. 그는 25년 전 무더웠던 여름,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안으로는 고독했던 그의 삶과 음악 행보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언론들은 '전설'과의 작별을 고했으며, 극성팬들은 그의 황천길 여행에 동참 하면서 엘비스의 '전설'은 종말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비스는 25년이 지난 현재도 세상에 없을 뿐 여전히 생존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20세기 최고의 인물로 우선 순위에 꼽혔던 엘비스. 전 세계는 2002년 8월의 추모 25주기를 맞아 그의 사망과 함께 막을 내린 줄 알았던 '전설'을 주인공 없이 써 내려 가기에 여념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엘비스의 영향력이 21세기에도 유효함을 그대로 입증해주고 있다. Elvis는 1956년 'Heartbreak Hotel'로 U.S chart 첫 1위를 기록 하였고, 영국에서는 그 이듬해인 1957년 'All Shook Up'으로 첫 1위를 기록 하였다. 그리고, 지난 6월에는 묻혀 있었던 " A Little Less Conversation"이 네덜란드 출신의 DJ JXL의 손길을 거쳐 영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1위를 기록했다. 엘비스의 시대는 여전히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최근 미국 ABC 방송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4명이 '로큰롤의 제왕은 엘비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응답자 10명중 9명은 엘비스가 미국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으며 50%는 그의 팬이라고 밝혔다. 또한 미국의 금융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지난 77년 사망한 엘비스가 작년 6월부터 1년간 벌어들인 소득이 모두 3700만달러(한화로 약 475억6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각종 조사의 결과들은 전설의 주인공 Elvis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전설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생활 주변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함께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 들이다. <empas 음악 리뷰(글 / 박성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