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족보

제주 남원양씨 족보

sej57 2017. 10. 22. 19:05

제주/남원 양 (, 들보 ) 씨ㅡ뿌리

1.제주/남원 양 (들보량 梁)

 
본관은 문헌에 제주(濟州) ·남원(南原) ·충주(忠州) ·양주(楊州) ·임천(林川) ·나주(羅州) 등이 전하지만 모두가 제주양씨에게 분적된 것이다. 양씨는 제주의 토박이 양씨(濟梁)와 육지의 양씨(陸梁)로 대별되는데, 남원양씨를 중심으로 한 육양계가 전체의 70 %를 차지한다. 또, 양씨는 모두가 탐라(耽羅) 삼성혈(三姓穴) 설화의 양을나(良乙那)를 단일시조로 하는 동계혈족이며 본래는 양성(良姓)을 쓰다가 신라 태종무열왕 때 탐라의 왕족이던 양탕(良宕)이 신라에 들어가 벼슬하면서 사성(賜姓)에 의해 양씨(梁氏)로 개성하였다.
 
남원양씨는 신라 통일기에 양자영(梁自瀛)이 공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남원에 관적하게 되었으며, 그 후대에 병부공파(兵部公派:梁能讓)와 용성군파(龍成君派:梁生雲)로 크게 나뉘는데, 병부공파가 남원양씨의 약 80 %를 차지한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4만 138가구에 인구 22만 5772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25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8만 1124가구에 인구 34만 3985명으로 성별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25위였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종 때 예부상서 ·좌복야 ·상서좌복야 등을 역임한 진(), 공민왕 때 개성윤(開城尹)으로서 흥왕사(興王寺)의 변에 공을 세워 1등공신에 오르고 우왕 때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로 있다가 창녕(昌寧)에 유배된 백익(伯益)을 들 수 있다. 또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인물로는 여공(汝恭)이 있다. 그는 세종 때 병조좌랑을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고 시와 글씨에 능하였다. 제주양씨의 인물로는 팽손(彭孫)이 있다.
 
그는 중종 때 교리로 재직 중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당했다가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후 복관되어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 그에게는 아들 5형제가 있었는데 특히 중종 때 동래부사(東萊副使)를 지낸 응태(應台)와 호당(湖堂)에 뽑히고 대사성을 지낸 응정(應鼎)이 뛰어났다. 응정의 아들 산숙(山璹)은 임진왜란 때 진주(晉州) 싸움에서 용전 끝에 순사하였다.

그 밖에도 산보(山甫) ·자징(子) ·천운(千運)의 3대가 학자로 이름났다. 남원양씨의 병부공파에서는 성지(誠之)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관료파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지중추부사 ·공조판서를 거쳐 좌리공신에 오르고 대사헌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손자 연(淵)은 대사헌 ·병조판서 ·좌찬성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고, 증손 구신(久信)은 임진왜란 때 순절했으며, 성지의 13대손 헌수(憲洙)는 고종 때 병인양요(丙寅洋擾)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뒤 어영대장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용성군파에서는 청백리에 녹선된 관(灌), 그의 후대인 희(喜) ·홍주(弘澍) ·황(榥) 등이 유명하다.
 
근세인물로는 3 ·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남원양씨의 전백(甸伯)과 제주양씨의 한묵(漢默), 그리고 독립운동가 기탁(起鐸) 등이 있다. 양씨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6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2. 버들 양()씨
버들 양씨 성은 제주/남원들보 양(梁)씨와는 시조(본관)을 달리하는 성씨로서 들보 씨와는 다른 성씨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분파는 아래와 같다.
 
- 청주양씨(淸州楊氏)
양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당숙우의 후손 백교가 진나라로 가서 양후에 봉해져서 양씨라고 했다. 청주 양씨의 시조 양기(楊起)는 그 후손으로 중국 원나라 때 도첨의시중을 지내다가 1351년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정착하여 살았다. 그뒤 공을 세워 삼한창국공신으로 상당(청주)에 봉해지고 관적을 청주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 남원양씨(南原楊氏)
시조 안경문(楊敬文)은 고려 때의 지영월군사로 그이외의 사적과 선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몇대에 걸쳐서 남원에 살아온 선비 집안이므로 본관을 남원으로 하였다.
 
- 밀양양씨(密楊楊氏)
시조 양근(楊根)은 청주 양씨의 시조인 양기의 후손이다. 그가 고려말에 밀성(밀양)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 안악양씨(安岳楊氏)
시조 양만수(楊萬壽)는 고려 때에 전서를 지냈고 공이 많아 안악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청주 양씨에서 분적해서 본관을 안악으로 하였다.
 
- 중화양씨(中和楊氏)
시조 양포(楊浦)는 고려 고종 때 정승을 지냈으며 당악(중화)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중화로 했다. 청주 양씨의 주장은 양포가 청주 양씨의 시조 양기의 여섯째 아들이라고 하지만 사실에 비추어 잘못된 주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성씨는 같은 혈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 통주양(通州楊氏)
시조 양
복길(자는 상보)은 중국 통주 사람으로 명나라 9의사의 한 명으로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를 따라와서 귀화해서 정착해 살았다. 후손들이 고향인 통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출처 : http://blog.daum.net/revolutionman/16107460